2월, 2024의 게시물 표시

감산사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상의 상징과 양식적 특징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형실에 전시되어 있는 통일신라 미륵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 아미타불상(국보 제82호)은 8세기 전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광선 뒷면에 새겨진 글귀 미륵불에는 381자, 아미타불에는 392자가 새겨져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호 남월산조(南月山 jo)에도 일부 비문이 기록되어 있어 두 불상이 창건 당시부터 중요한 불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갖고 있다 광배 비문에 따르면 성덕왕 18년(719년) 2월 15일(부처 열반일) 신라 관료인 고 김지성 감산사가 일길찬(一吉 ()과 그의 어머니 관초리·불상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김지성은 여러 관직을 거쳐 집사부에 오른 6계급 인물이다. 그는 성덕왕 4년(705)에 견당사로 당(黨)사에 참배하였고, 비문에 병장(尙舍)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뜻을 이루지 못하고 67세의 나이로 조정에서 물러났다. 농촌으로 돌아온 그는 한편으로는 노자와 장자의 조용함에 감탄했는데, 719년 재산을 내놓아 정성을 다해 감산사를 지었고, 이듬해인 720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륵상에 새겨진 글의 끝부분에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관초리의 유골이 동해의 헌지 해안에 뿌려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김지성이 어머니 관초리를 위해 미륵상을, 아버지 일길찬을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왕의 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는 청원으로 김지성의 친남매 개원 이찬, 전처와 재처, 서형(西 () 등 법조계의 지각 있는 존재들이 모두 함께 한다. 모두가 그들이 세상을 벗어나 부처의 영역으로 올라가길 기도했다. 그러한 내용은 흔히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미륵불과 아미타불은 정원 조성 7년차인 719년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보살 비문에는 비문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아미타불 비문에는 김지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대사(大使)인 김치원(金-元)이 ...

조선의 이상적인 세계가 담겨 있는 영취사 영산회상도

  영취산은 인도 왕사성 인근의 기생산을 번역한 것으로 산꼭대기가 독수리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영취산 석가모니 부처의 설교는 열반 직전 최고의 승려들의 설법 내용 중 하나로 여겨진다. 당시 설교를 기록한 『법화경』은 영취산에서의 설교를 그린 불화를 영산회상도라고 한다. 연꽃처럼 순수한 가르침을 뜻하는 『연화경』에는 타타가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줄 가르침이 담겨 있다. [연화경]은 무수한 비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불협화음으로 표현될 때는 주로 연화경 서품에 등장하는 설교를 그린다. 명상에 잠긴 타타가타는 아무 말 없이 사마디에서 열리고, 그녀의 몸에서 비치는 빛을 통해 관객은 상서로운 광경을 보게 된다. 경전은 미륵보살이 타타가 보여준 상서로운 일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고, 침묵의 타타가 그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타다가타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높은 수미단 위에는 명상에 잠긴 오른손을 쉬며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석가모니 부처가 있다. 화면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붉은 불꽃의 다섯 가지 색으로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일행의 외곽에는 불교가 전파되는 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사천왕과 팔불상이 배치됐다. 불교에서는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가루라, 건달바 등 8불에 사천왕 일가의 지위를 부여해 화면 상단에 배치했다. 부처가 앉은 제단 앞에는 보살 문수와 보살상이 대칭적으로 서 있다. 지혜와 행동, 깨달음과 깨달음의 실천을 상징하는 두 보살은 가르침의 내용이 담긴 수트라와 연꽃을 들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잘 지켰다는 노승 가섭과 창백한 머리의 젊은 비구 아난도 타타가타 좌우에 섰다. 모두가 공손히 손을 모아 설법을 하는 석가모니 부처 앞으로 향할 때도 정면을 바라보는 두 보살상이 눈에 띄었다. 흰 법의를 입은 관음보살은 손에 맑은 물병을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금고에는 작은 타타가 안치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동반자는 세지 보살이다. 그들은 지각 있는 존재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해산첩이 담고 있는 금강산의 전경 금강전도

  1797년 가을, 조선 후기의 학자 수영(1743-1831)이 금강산을 탐방했다. 그는 유탄(an ()으로 금강산의 풍경을 스케치했고, 이를 바탕으로 2년 뒤인 1799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에 걸쳐 가을 금강산[해산첩]을 완성했다. 지리학자 가문의 후손인 수영수는 남다른 관찰력과 독자적인 원근법, 사물의 배열 방법, 독특한 필법 등이 특징인 금강산을 직접 그린 그림을 남겼다. 가을이 오면 단풍의 계절인 현대인들은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을 기념해 사진을 찍어 블로그 등 개인 웹사이트에 올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한다. 사진을 보면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개인의 취향, 흥미, 시각적 경험에 따라 촬영 대상이 다르고, 같은 피사체를 찍어도 카메라 종류, 촬영 각도, 사진작가의 실력에 따라 각기 다른 사진이 제작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가을 여행의 추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금강산을 찾은 작가들이 여행문학을 남겼고, 정선·김홍도·심심정 등 화가들은 단풍으로 물든 금강산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지우만큼 찾기 어렵다.애수영의 [해산첩]. 옅은 붉은 색을 사용하여 금강산의 가을을 그린 [해산첩]은 해금강 바다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이라는 그림, 내금강 9경, 외금강 5점의 그림에 어울린다. 4개의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강산의 여정과 풍경을 그린 정수영의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점도 다른 금강산 그림과 다르다. 수영이 [해산첩]에 기록한 첫 번째 그림 <금강전도>는 익숙한 정선식 금강전도와는 많이 달라 신선한 느낌을 준다. 정수영이 역삼각형의 공간에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를 눈앞에 뒀다. 화면 중앙 하단에 사람이 앉는 꼭짓점이 있는 역삼각형 공간은 그 지점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 경험할 수 있는 최대 시야 범위가 될 것이다. 이 그림의 앞면에 기록된 동유기(東ugi記)에 따르면 정수영은 "새벽에 내린 ...

유례가 없던 독특한 작품 강세황의 영대기관첩

  조선시대에는 국경을 넘어 외국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행(四行)이 다른 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적인 방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현감의 규모는 정사, 부사, 서, 욕완, 의관, 화원 등 30여 명이다. 조선 시대 기준으로 300여 명에 달하며, 조선 시대 내내 총 500여 차례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수백 명이 함께 중국으로 떠나 공무를 수행하고 조선으로 돌아가기까지 5개월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명나라에서는 황제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뜻에서 '조천( (川)'이라고 불렀고, 청나라에서는 연경(ref京·베이징을 지칭)으로 간다는 뜻에서 '옌행( (行)'이라고 불렀다. 조천과 연행은 둘 다 '중국의 구불구불'을 말하지만, 조공관계를 생략하고 보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 있는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생각을 담고 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정은 같지만 시대에 따라 노선이 달라지고, 그곳에 가는 목적과 결심도 다르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육지를 피해 바닷길로 나섰고, 늘 조난사고 위험이 있는 구불구불한 바닷길은 조선시대 관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구불구불한 길을 갈 수 없을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광경을 통해 지식을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발전적 기회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시대와 거기에 간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변화하는 이 역동적인 구불구불한 길의 중심에 예술가들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극단 소속 화가들이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교류하면서 구불구불한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들의 작품에는 힘든 여정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화가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배를 탄 구불구불한 바닷길,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접한 이국적인 풍경, 문헌을 통해서만 듣던 중국의 역사 유적지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경험을 간접 체험했다. 18세기, 성찬을 누구보다 갈망한 18세기...

사람의 모범이 되는 책자 오륜행실도

  맹자에서는 '다섯 개의 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을 짐승과 구별한다고 한다. 오륜은 부모와 자식, 왕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자녀, 친구 등 기본적인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실천적 덕목이다. 부모와 자식 간 친밀감, 왕과 신하 간 의리, 부부 간 구분, 어른과 자식 간 질서, 친구 간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중 군신, 부자, 부부간의 원칙은 따로 '3대 강'이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를 '3대 강 5원'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삼강과 오륜에 주목하며 유교 윤리의 확산에 힘썼으며 행실도를 편찬·간행하였다. 행실도는 충신, 효자, 열녀 등 본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림을 모아 놓은 것이다. 행실도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스토리마다 그림을 담았다. 행실도의 내용은 별도의 그림이나 병풍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최초의 행실도는 세종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이다. 그 이후로, 행실도의 전통은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되었다. 성종 때 [삼강행실도] 언본이 간행되었고, 그 후 이 판본을 바탕으로 재간행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중종 때 언해온의 대규모 철수와 함께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선조 때 그는 전대에 내려온 행동지도를 다시 간행하고 효자, 충신, 효녀에 대한 포상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圖)]는 편찬되어 출판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흐트러진 국기를 바로잡고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 조선 초기 관제와 문화가 전반적으로 재편된 정조 때 [오륜행실도]가 새로 편찬되어 간행되었다. [오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와 [두륜행실도]의 종합판이다. 1797년(정조 21) 정조의 명을 받아 심상규(1766~1838)와 이병모(1742~1806)가 세종의 『삼강행실도』와 중종의 『이륜행실도』를 합쳤다. 이 책은 개정되어 요약본으로 처음 출...

경주 보문동합장분 금 귀걸이의 주인

  이 귀걸이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경주 보문동 합동묘에서 출토되었다. 아주 작은 금과 금실을 사용한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문개 등 삼국시대 귀걸이 중 가장 권위 있는 귀걸이로 1962년 국보 제90호로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입구에 있는 명품 코너에 전시되어 있어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이 귀걸이의 제작 방법과 무늬는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으나, 귀걸이의 출토 경위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발굴 당시 이들이 부부였을 뿐이라는 추측은 오래전부터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발굴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96년간의 발굴 끝에 이 무덤에 대한 발굴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도가 나가면서 기존에 오해하고 알 수 없었던 일들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를 바탕으로 발굴 과정과 구조, 귀걸이는 누가 소유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강제병합 이전에 일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도 대상이 됐다. 주로 사찰 터에 남아있는 석탑과 건축물의 실태를 조사하였고, 유구도 조사하였다. 1915년 보문동 고분 조사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신라 고분 발굴이 있었지만 공식적인 발굴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돌무지덧널무덤[積地 bodies]의 경우 시신이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에 그쳤다. 경주 일대에 대한 일제강점기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보문동 고분군 발굴과 함께였다. 보문동 고분군은 세키노 다다시 조사단이 발굴한 것이다. 1915년 7월 6일 발굴조사를 시작해 다음 날 돌방무덤에 대한 내부조사가 마무리됐고, 12일 석곽묘가 완공됐다. 조사단은 두 무덤을 조사한 뒤 내부 구조와 유물 현황을 간략하게 남겼다. 이 귀걸이는 돌방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보문동 고분은 한 무덤에 두 개의 매장시설(돌무지 부장, 돌방)이 있는 무덤으로, 돌무지 부장묘가 먼저 조성되었다. 이후 원래 무덤의 한쪽을 헐어 매장하고, 돌무지 옆에 붙여 돌방을 만든 뒤 다시 흙으...

영혼의 불멸 스토아학파의 헬레니즘 철학

  정치적 불안정이 닥치면 개인은 속으로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하는 에피쿠로스주의(기원전 341년~270년)의 향락주의, 스토아 금욕주의, 피론주의(기원전 360년~270년)의 회의주의 등이 모두 불안정한 상태에서 탄생했다. 고대의 쾌락주의는 오늘날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에피쿠로스가 그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은 육체의 즐거움이 아니라 마음의 '아타락시아'였다. 금욕주의도 마찬가지다. 스토아식 '물어보기'는 중세처럼 자기 수양의 목적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일 뿐이었다. 세계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시도도 회의적이었다. 회의주의 학파의 대표인 피론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 스토이즘, 파이론의 회의론은 삶의 목적이 마음의 교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내적 행복(에우다모니아)을 얻도록 설정한 한 가지였다. 세 학교의 차이는 그들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소로 본 것에 있었다. 회의론자들은 그 요소를 세계의 "관점"으로 보았다. 결국 세상엔 확실한 게 없으니 의견이 없는 게 낫다. 스토아 학파는 그 요소를 '열정'으로 보았다. 그러면 열정은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을 조절해야 합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사람들은 그것을 '고통'으로 보았고, 그들은 마음의 고통이 주로 하나님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 평정에 도달하는 에피쿠로스적 방법은 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 근거 없는 감정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을 벌하신다는 이야기는 유치한 허구일 뿐이다. 원자론자로서, 그들은 우주는 충돌하는 원자로 만들어진 무정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설계자나 건축가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

마음의 병이 걸리는 이유와 해결방안

  왜 심각한 감염성 질환이나 자가면역 질환이 종종 우울증을 유발하는가? 세계에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가장 많은 연예인은 가수 셀레나 고메즈다. 팔로워가 1억 4천만 명이 넘었어요. 안타깝게도, 그녀의 부와 명예를 공유하는 고메즈는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를 앓고 있다. 그녀는 그것 때문에 친구를 위해 신장 이식을 받았습니다. 고메즈는 루푸스와 투병하는 동안 우울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든 세계 투어를 취소했고 3개월 동안 우울증으로 집중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최근 인터뷰에서 "루퍼스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우울증을 주었다"고 말했다. 우울증을 완전히 극복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평생 우울증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간염 바이러스 감염, 호흡기 감염 등 중증 감염병이나 류마티스 관절염, 루푸스, 건선 등 자가면역질환이 있는 환자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쉽다. 한 연구는 1945년과 1995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덴마크인들을 조사했다. 심각한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울증, 공황장애와 같은 기분장애를 겪을 확률이 62% 더 높았다.2) "글쎄, 그건 당연하지, 그렇지 않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중증 질환은 장기 입원을 필요로 한다. 밥을 먹거나 목욕을 할 때 몸을 깔고 앉는 것도 불편하다. 돈이 들어오지 않고 돈이 많이 나간다. 스트레스가 급증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우울증에 빠질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설명도 가능합니다. 우울증은 병원균에 의해 가해진 깊은 상처가 아니라 병원균에 대한 신체의 면역 반응을 강화하는 방어 메커니즘의 일부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울증은 감염에 의한 기능장애보다는 병원체를 근절하기 위한 적응행동 중 하나일 수 있다.3) 우울증은 평생의 적이라는 고메즈의 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4) 마지막 회부터 이어지는 숙주 방어 가설을 살펴보자. 우울증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아래와 같으...

문학 속에 담겨 있는 제국대학

 도쿄대 문학부 출신인 다자이 오사무,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임페리얼대학에서 배출한 유명 작가들이 많다. 특히 소세키의 거의 모든 소설에는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나 졸업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임페리얼 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후, 소세키는 교육부에서 장학생으로 영국 런던에서 공부했다. 유학 중, 그는 현대 유럽 문명에 압도되어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세키는 서구 문명의 무조건적인 흡수에 점차 회의감을 느끼고 개인과 국가 모두 독립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자기중심주의' 사상을 형성했다. 그는 서양 문명을 흡수하려는 강박과 그에 대한 회의감 사이에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귀국한 소세키는 제1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신경쇠약의 치료제로 쓰인 소설 '나는 고양이다'의 성공 이후, 소세키는 교직을 그만두고 아사히 신문의 전업 작가가 되었다. 소세키 나츠메는 메이지 일본의 명암을 제국대학과 그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장편 '나는 고양이다'는 고양이의 눈을 통해 메이지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소설에서 구사미와 그의 친구 메이테이, 간게쓰 등 메이지 시대의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제국대학 학부생들이다. 소세키는 두 번째 장편 '거장'에서 서구 근대화를 모방하기 위해 서두른 일본 근대화의 문제점을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냈다. 소세키는 시대의 흐름에 무감각한 정직한 신사 '나'와 수학 교사 '산매드맨'과 임페리얼대학교 문학사 교감 '빨간 셔츠'의 대결을 통해 이러한 주제 감각을 구현한다. '레드 셔츠'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인물로, 동료 선생님의 부유한 약혼자를 가로채고 게이샤를 마구 스토킹하는 동안 도덕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말끝마다 서양의 이론과 잡지에서 낭독한 구절이 실려 있지만 교육자로서 자신만의 생각과 소신은 없다. 그는 교활한...

한국 과학기술 성장의 표본 반도체의 발전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생소한 진실 지금까지 과학기술 연구는 사람들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의외의 특징이 많다. 이것이 '뜻밖의 모습'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과학기술 '연구'를 중·고교 시절 공부한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지식'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지식'은 과학기술적 '연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는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고 더 역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연구'는 명확한 답변과 표준 해법을 가진 문제가 아니라 문제 설정 자체가 제대로 돼 있는지부터 조사해야 하는 문제다. 개별 학문 분야에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규칙과 유용한 지침이 많지만, 누구나 기계적으로 연구 결과의 진실을 따르고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방법론은 없다. 헷갈려서 열심히 연구해도 틀릴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역사에 남을 '천재' 연구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과학기술 혁신은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알고리즘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연구자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성'의 산물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연구를 '너무 인간적'으로 만든다. 수많은 검증과 교양을 거쳐 과학 교과서에 실리는 과학적 지식은 '인간'의 매력 없이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다만 실제 과학기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구과정은 연구자 개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실천활동이다. '상상'과 '창조성'의 복잡한 진실 고정관념과 달리 복잡한 조건에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상상력과 창의력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살펴보는 시간도 가졌다. '기존의 틀을 깨는 자유로운 사고'...

부부와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모던 패밀리

  '모던 패밀리'라는 미국 TV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구성원들은 전통적인 가족과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하지만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는 일에 웃고 울고 웃으며 함께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건강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그는 딸보다 어린 남미 미인과 함께 수영장이 딸린 저택에서 살고 있다. 젊은 아내가 전남편과 낳은 막내 아들을 돌보며 새로운 '아버지' 역할에 한창이다. 전처에게서 태어난 딸과 아들이 벌써 중년이다. 사업 후계자가 될 딸은 삼남매를 키우고 있고, 큰 손녀딸은 이미 대학생이다. 제 아들은 변호사이고 성소수자입니다. 그는 동성 축구 코치와 결혼하여 아시아 소녀를 입양하고 키웠다.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의 '계보학'을 따르는 것은 매우 복잡한 가족일 수 밖에 없다. 우리보다 더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특이한 소재이기 때문에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변호사의 눈이 없어도 갈등의 원인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이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며, 다양해진 가족관계는 다른 사람들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백세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배우자와 이혼하거나 과부가 되어 재혼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세 번의 결혼도 있었다. 이로 인해 현행 상속제도에 매우 복잡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새로운 결혼에서는 각각의 배우자가 서로를 상속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자녀의 자녀들이 새롭게 상속자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 드라마 속 새엄마를 딸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지만 계모의 존재가 탐탁지 않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혼자 있을 때, 그와 그의 남동생은 아버지의 유산을 절반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계모와 남동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혈통으로 따지면 아버지의 자식도 아니다. 그래도 상속의 측면에서는 계모와 자녀들에게 더...

정신장애의 진화적 토대 마음의 병

  J. Anderson Thompson 주니어, M.D.는 거의 40년 동안 미국 버지니아에서 정신과 클리닉을 운영했습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수염이 덥수룩한 신사입니다.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톰슨은 우울증을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장애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종종 우울증 환자에게 신경전달물질의 방출을 조절하는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어느 날 톰슨에게 치료를 받던 우울증 환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뜻밖에도 그 여자에게 그녀의 항우울제를 그만 처방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라고 톰슨이 물었습니다. "그 항우울제는 효과가 있지 않나요? 다른 종류의 항우울제를 처방할 수 있습니까?" 여자가 대답했어요. "아니, 잘 들린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톰슨이 결코 잊지 않았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나는 아직도 그 망할 주정뱅이와 그녀의 남편과 함께 살고 있어! 당신은 마약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다 국정원이 휴대전화를 도청한다고 믿거나, 손을 수십 번 씻거나, 하루 종일 우울하게 벽면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귀신의 소유로 묘사돼 왔다. 오늘날, 정신 질환은 뇌의 오작동으로 인한 생물학적 질병이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몸에 질병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아 약물로 치료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질병이 생기면 약물로 치료한다. 문제는 정신의학에서 왜 마음이 아픈지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이 없다는 점이다. 아니, 뇌의 어느 부분이 잘못됐는지를 꼬집는 뇌과학이 정신질환의 원인을 밝혀내지 않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뇌과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그 원인을 밝혀낸다. 이는 물론 중요하지만 정신질환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애초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왜'의 진화적 원인을 규명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아직 정신장애를 충분히 설명하는 이론이 없다는 사실은 정신장애 분류체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책 <정신장애 진단 및 통...

살균과 세균이 공존했던 가습기의 비극

  '박테리움'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살아있는 유기체 중 가장 작고 가장 낮은 단세포 유기체"이다. 일반적으로 단세포로 구성된 미생물의 총칭으로 영어로는 "박테리아"라고도 불린다. 모양에 따라 둥근 모양의 구균(코커스), 긴 막대 모양의 구균(바실러스), 나선형의 구균(스피릴라)으로 나눌 수 있다. 구균 중에서는 포도 군집처럼 뭉쳐 있는 연쇄상구균이나 포도상구균 등이, 나선형 세균 중에서는 비브리오와 렙토스피라가 병원균의 친숙한 이름이다. 박테리아와 쉽게 혼동할 수 있는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보다 훨씬 작고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역할을 하는 병원이다. 그 예로는 독감 바이러스와 메르스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박테리아는 매우 하찮은 유기체이기 때문에 종종 다른 유기체와 공존한다. 소, 양 등 반추동물의 소화기관에 서식하는 셀룰로모나스나 바실루스는 풀 속의 셀룰로스2)를 분해해 지방산이 소의 신체 조직에 흡수되도록 만든다. 또한 분해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생물군으로서 박테리아는 유기물을 분해해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무기물질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콩과 뿌리에 서식하는 다리박테리아는 대부분의 식물이 사용할 수 없는 질소를 잘 부서지지 않는 삼중 결합을 통해 질소화합물로 전환한다. 목표는 콩을 단백질이 많이 함유된 식품으로 만들어 "야생 쇠고기"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너는 이걸 읽고 있어. 일반적으로 인체에 서식하는 세균의 수는 인체를 구성하는 전체 세포 수보다 많다. 성인의 체내 세포 총량은 약 2kg이며, 그 중 장내 세균은 약 1kg이다. 나머지는 입, 피부, 다른 소화기관, 자궁, 질과 같은 신체의 다양한 기관에 분포되어 영양소의 소화 및 흡수, 알레르기를 포함한 면역 반응, 그리고 생활 환경의 산도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세균의 종류가 제한됐던 자궁의 환경에서 자란 태아가 산도를 통해 나오면서 산모의 체내 각종 세균과 마주치는 과정에서 면역체계가 각각의...

제국대학의 조선여학생 김삼순 조현경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볼테르의 연인 샤텔 후작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하인들이 인간이라는 확신을 갖지 않고" 그들 앞에서 주저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서구 시민혁명이 진행되면서 하인이나 남성 노예들은 자유로워졌고 투표권이 주어졌다. 다만 여성의 경우 귀족 여성이나 부르주아 대가족의 부유한 여성들도 투표권이 없었다. 여성들은 20세기까지 투표할 권리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여성들은 뒤늦게 해방된 노예가 된다. 교육은 다를까요? 에블린 폭스 켈러는 과학과 젠더에서 문화적으로 타당해진 지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의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남성의 재산이고, 여성적 사고는 비과학적이라는 사고방식 아래 여성을 위한 교육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 후 근대에는 민족국가의 필요에 따라 여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는 여성의 교육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에 국한되었다. 일본에서도 여성 교육자를 양성하는 여고교원학교와 음악·예술학교 등 예술 분야를 제외하면 최고 교직원의 입학이 거의 막혔다. 교육 내용 면에서는 본격적인 지식 교육이 소홀해지고, 가부장적 가정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규율이 강조되었다. 한 여고 교장은 "여자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남편의 책꽂이에 먼지를 덮어 엎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유럽어를 가르쳐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일제의 지배 엘리트 육성을 위한 장치였던 임페리얼 대학교는 특히 개교 이래 오랫동안 금단의 여성의 영역이었다. 일본은 천황이 정점에 달한 대가족 국가였으며, 사회는 계층(신분)과 성 계층으로 나뉘었다. 제국주의 국가를 지탱하던 제도인 제국대학은 남자 교사와 학습자만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문부과학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행적 대형 사건'이 발생한다. 1913년 8월 16일 도호쿠 대학에서는 최초로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깜짝 놀란 교육부는 총장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화학과의 구로...

시공간을 넘어서는 홀로코스트와 제 3세계의 역사

 식민지 집단 학살과 홀로코스트는 얼마나 비슷한가? 아우슈비츠 평화화해를 위한 연구소(AIPR)는 2007년 교육과 정책 개발을 통해 집단 학살에 맞서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뉴욕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 부에노스아이레스, 캄팔라에 사무소가 있으며 설립 배경은 2000년 1월 스톡홀름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각국 정상 23명과 부총리 14명, 외교부 장관 등이 46개국을 대표해 서명한 선언문은 홀로코스트 기억을 국경을 초월한 시민의 미덕으로 못 박았다. 그는 또한 동유럽 국가들이 나토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준의 학교에서 홀로코스트를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국가의 전유물적 기억을 넘어 전 세계 시민사회의 규범적 기억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이 선언은 홀로코스트의 고유성 논지를 훼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홀로코스트가 다른 집단 학살과 비교할 수 없다는 독특한 논지는 결국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계적인 관점으로의 이해를 방해할 것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 신성화되고 특권화되면 국경을 초월한 시민사회의 미덕으로 자리매김하기 어렵다. 유대인만이 홀로코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닫힌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AIPR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우간다 캄팔라에도 사무소를 차린 것은 세계 기억공간에서 홀로코스트와 제3세계 집단학살이 연대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실제로 연구소는 매년 8월 9일 세계 원주민의 날에 특별 성명을 내고 세미나를 개최해 왔다. 2018년 8월 9일에 개최된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초국가적 이민과 원주민의 이동이었다. 집단학살 연구원인 댄 스톤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50건 이상의 집단학살이 행해졌다. 전후 대부분의 집단학살에서 국가 권력은 개발을 명분으로 원주민 소수 부족에 대한 폭력을 행사했다. 미얀마 정부군에 의한 로힝야 대학살이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이들은 문명의 이면에서 발생한 '진보의 희생자들'이었다...

경주 감은사터 삼층석탑 출토 사리갖춤 의미

 한국의 산에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산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찰들을 둘러보게 된다. 부처가 모셔진 금관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지만 금당 앞에 서 있는 탑은 보이지 않는다. 왜 사찰마다 3층 또는 5층의 탑을 정사각형으로 자른 채 지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탑처럼 부처가 모셔져 있는데 불상처럼 눈에 띄지 않아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다행히 세월이 흘러 골든홀마저 사라진 폐허 터에 서 있는 탑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처의 시신이 화장된 후, 부처의 유해는 사리스(四is)라고 불린다. '사리'라는 단어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ararrara'를, 팔리어로 'sar thera'를 뜻하는 'sarrara'에서 유래했다. 팔리 문자에서는 죽은 사람의 몸인 '사라'와 화장 후 남은 진주나 가루 같은 재인 '다투'를 구분하기도 한다. 부처의 유물은 무덤의 일종인 탑에 모셔져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탑을 뜻하는 스투파와 팔리어로 사리를 모신 곳을 뜻한다. 부처의 유물이 있는 탑은 가장 중요한 숭배 대상이며, 대부분의 인도 사원은 탑을 중심에 두고 있다. 불교가 시작된 인도에서는 불상보다 탑이 먼저 등장했다. 부처의 유물을 숭배하는 사리교는 그만큼 역사가 깊다. 무심한 듯 절을 바라보던 탑 속에는 불교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 처음 들어온 사리는 삼국시대인 549년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10년에 양씨로부터 중국으로 불교 유물이 보내졌고, 582년(진평왕 4)에 이 시기에 가져온 유물 1200점이 대구 동화사에 봉안되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643년 자장대사가 당으로부터 100개의 버두골, 부처, 사리, 가사를 받았다. 제가 양복 하나를 가지고 와서 유물을 세 개로 나눠서 황룡사, 태화사,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놓았습니다. 나머지는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

황남대총 금제 허리띠의 상징과 미스터리

 신라에서 우월한 통치자가 등장하고 고대 국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4세기 중엽의 마립간 등장이다. 마립간 시기의 물리적 증거는 신라 고유의 무덤인 돌무지 무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돌무지무덤은 나무 박격포가 돌무더기로 덮여 있고 그 주변에 흙이 높이 쌓여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에는 세상과 사후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에 따라 거대한 봉토를 가진 무덤이 많이 매장되었다. 주로 마립간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6세기 중엽 신라 중기와 중기까지 종말이 이어진다. 신라의 황금 왕관은 마립간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등장하고 변화하였다.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에서 출토되었다. 학자들은 이 무덤이 신라 돌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고 귀금속 장식품, 희귀 수입품, 다량의 철제품과 토기가 매장되어 있어 왕릉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왕의 무덤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 1976년 문화재위원회에서 '황남대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경주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연결된 2기의 무덤이다. 발굴 조사 결과, 먼저 조성된 남쪽 무덤[ []이 왕의 무덤이고, 북쪽 무덤[北]은 조금 늦게 그 뒤를 이은 왕비의 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남쪽 무덤과 북쪽 무덤은 모두 돌무덤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내부 구조상 남쪽 무덤은 별도의 몸통 주벽과 부장품으로 채워진 측면벽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북쪽이 왕비의 무덤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은제 허리띠 장식에 '"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인데, 이 '아내'라는 표현은 당시 왕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여왕의 허리띠'는 여왕의 허리띠를 의미합니다. 황남대총의 북쪽 무덤에 묻힌 왕비는 금관과 금띠 외에 금팔찌, 금반지, 금목걸이, 가슴장식 등으로 장식되었다. 비록 그녀의 비단옷과 그녀의 장신구를 덮었던 천은 거의 다 썩어버렸지만, 남...

갈항사지 삼층석탑의 아름다운 비율과 흔적

 758년 김천의 갈항사 터에 아름다운 비례의 쌍둥이 탑이 세워졌다. 원조는 신라 38대 왕 원성왕의 어머니인 박씨, 그녀의 동생, 그리고 그녀의 누이였다. 이들이 어떤 간절한 열망을 품고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을 세운 지 27년 만에 겸부인이 황태후가 됐고, 그 뒤에 청탁을 한 세 사람이 탑에 기록됐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석탑의 외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라와 백제를 대표하는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형태로 재현되었다. 이것은 7세기 말 경주의 가운사와 고선사에 세워진 삼층 석탑이다. 통일왕조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듯, 이 탑들은 안정성과 압도적인 웅장함이 돋보인다. 1층 탑의 상층부 중앙까지 긴 기단을 가진 삼각형 구도를 더하여 안정성을 높였으며, 층간 높이와 지붕의 비율을 균일하게 느껴 이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성과 웅장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발전하고 변화하였으며, 비례가 희박하게 변화하였다. 탑의 크기가 작아지고, 돌을 조합하고 쌓는 방법이 규칙화·효율화되었으며, 기단이 긴 삼각형 구조도 기단이 점차 좁아지는 구조로 바뀐다. 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하단의 정삼각형 구성과 절묘한 접선감을 갖춘 신라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비율의 석탑은 경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알찬 부분이 있지만, <석가탑>에 버금가는 비례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8세기 중엽 유행했던 비례성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반형 석탑이 등장한 7세기 말부터 비례적 완성을 이룬 8세기 중반까지 석탑 표면에 못을 박는 일은 석탑 귀퉁이에 바람대를 붙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모습은 일찍이 제작된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첫 고층탑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나, 대중화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현존하는 예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탑에 금동판을 부착하기 위해 뚫은 못구멍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 갈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