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항사지 삼층석탑의 아름다운 비율과 흔적
758년 김천의 갈항사 터에 아름다운 비례의 쌍둥이 탑이 세워졌다. 원조는 신라 38대 왕 원성왕의 어머니인 박씨, 그녀의 동생, 그리고 그녀의 누이였다. 이들이 어떤 간절한 열망을 품고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을 세운 지 27년 만에 겸부인이 황태후가 됐고, 그 뒤에 청탁을 한 세 사람이 탑에 기록됐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석탑의 외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라와 백제를 대표하는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형태로 재현되었다. 이것은 7세기 말 경주의 가운사와 고선사에 세워진 삼층 석탑이다. 통일왕조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듯, 이 탑들은 안정성과 압도적인 웅장함이 돋보인다. 1층 탑의 상층부 중앙까지 긴 기단을 가진 삼각형 구도를 더하여 안정성을 높였으며, 층간 높이와 지붕의 비율을 균일하게 느껴 이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성과 웅장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발전하고 변화하였으며, 비례가 희박하게 변화하였다. 탑의 크기가 작아지고, 돌을 조합하고 쌓는 방법이 규칙화·효율화되었으며, 기단이 긴 삼각형 구조도 기단이 점차 좁아지는 구조로 바뀐다. 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하단의 정삼각형 구성과 절묘한 접선감을 갖춘 신라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비율의 석탑은 경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알찬 부분이 있지만, <석가탑>에 버금가는 비례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8세기 중엽 유행했던 비례성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반형 석탑이 등장한 7세기 말부터 비례적 완성을 이룬 8세기 중반까지 석탑 표면에 못을 박는 일은 석탑 귀퉁이에 바람대를 붙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모습은 일찍이 제작된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첫 고층탑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나, 대중화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현존하는 예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탑에 금동판을 부착하기 위해 뚫은 못구멍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 갈항사에 세워진 두 탑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된 이 기법이 현지의 신성한 것으로 보였을까?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기단부 배치와 부재 간 비율을 분석해 보면 758년에 건립되었다는 비문은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못구멍의 문제는 기존과 다르다. 접근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못구멍 표현을 한 사례는 경주에서 <고선사 삼층석탑>을 제외하면 단 한 건뿐이다. 이것은 경주 반월성 근처에 있는 <전인인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다.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탑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오고 있으며, 많은 부재들이 소실되었다. 특히 석탑에 있는 못구멍의 배치는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차이가 있지만,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뚫은 구멍의 엄숙한 취지는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전인사지 삼층석탑>은 지표의 웅장함을 발전 단계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갈항사지 삼층석탑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중간 단계로 유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경신 태왕(敬信太王)과 소품황후(小 (皇 dow)가 확인되는데, 이들은 각각 원성왕과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고 있다. 이 비문이 중요한 이유는 원성왕 때인 785년에서 798년 사이에 그가 왕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그가 성(城) 대신 '경신'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왜 건립 당시가 아니라 원성왕 때 임금님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상소를 탑에 새겼을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경신이 왕이 된 후 그의 친척들이 원래의 절인 갈항사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추가적인 불교 행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불멸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탑에 박힌 못구멍과 명문이 그러한 숨겨진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특징이었던 못구멍은 건립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원성왕 때 지표면 장엄함을 위해 새로 뚫었다. 사지 동서의 삼층석탑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해석하면 지금까지 서양문화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됐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 석탑」의 또 다른 특징은 1층 석탑의 중앙 부분이 거칠다는 점이다. 보통 이러한 흔적은 노출되지 않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데, 상층탑의 중앙 부분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초기 고유섭(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이 원래 사천왕상이나 보살상과 같은 구원상이 새겨져 있다고 추정한 이후, 그러한 흔적은 다른 의견이 없을 정도로 뚜렷하다. 이 흔적들은 앞서 언급한 못구멍과 함께 탑을 이해하는 데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세워질 당시 1층 탑에 부조가 새겨져 있었고, 부조가 사라진 후 이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음을 동시에 알리기 때문이다.
결국 원성왕 때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추가로 위엄을 갖추는 과정에서 기존의 부조상은 사라지고, 이미 계획된 금동판도 이곳에 부착되어 더 이상 다듬을 이유가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상층탑 중앙의 거친 표층 흔적을 통해 석탑 표면에 못구멍을 뚫은 시기가 원성왕 때라는 추정을 확인할 수 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그 비율이 아름답고 758년이라는 절대적인 연대를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석탑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유적이다. 짧지만 묵시적인 글씨 등 이 탑들의 독특한 특징을 통해 당시 신라 사람들의 사상과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논의된 사항들을 제외하면, 이 두 타워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두 탑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면서 비슷한 부분이 많이 출토된 사리장엄구와 그 속에서 나온 <전제진곤>, 사리장엄구 발굴 위치 등 앞으로 풀어야 할 퍼즐이 많다.
특히 비슷한 양상들이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자아낸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나요? 계획된 의장님이신가요? 아니면 단순한 실수로 치부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