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가 없던 독특한 작품 강세황의 영대기관첩

  조선시대에는 국경을 넘어 외국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행(四行)이 다른 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적인 방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현감의 규모는 정사, 부사, 서, 욕완, 의관, 화원 등 30여 명이다. 조선 시대 기준으로 300여 명에 달하며, 조선 시대 내내 총 500여 차례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수백 명이 함께 중국으로 떠나 공무를 수행하고 조선으로 돌아가기까지 5개월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명나라에서는 황제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뜻에서 '조천( (川)'이라고 불렀고, 청나라에서는 연경(ref京·베이징을 지칭)으로 간다는 뜻에서 '옌행( (行)'이라고 불렀다. 조천과 연행은 둘 다 '중국의 구불구불'을 말하지만, 조공관계를 생략하고 보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 있는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생각을 담고 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정은 같지만 시대에 따라 노선이 달라지고, 그곳에 가는 목적과 결심도 다르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육지를 피해 바닷길로 나섰고, 늘 조난사고 위험이 있는 구불구불한 바닷길은 조선시대 관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구불구불한 길을 갈 수 없을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광경을 통해 지식을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발전적 기회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시대와 거기에 간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변화하는 이 역동적인 구불구불한 길의 중심에 예술가들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극단 소속 화가들이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교류하면서 구불구불한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들의 작품에는 힘든 여정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화가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배를 탄 구불구불한 바닷길,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접한 이국적인 풍경, 문헌을 통해서만 듣던 중국의 역사 유적지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경험을 간접 체험했다.


18세기, 성찬을 누구보다 갈망한 18세기 신부가 있었다. 이 사람은 표암 강세황(1713-1791)이다. 그는 시화의 대가였으며, 조선 화가들의 스승이자 비평가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시를 쓴 시인이었고, 회화의 화가였으며, 글쓰기의 대가였다. 강세황은 초야에 묻혀 시화를 통해 예술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나서, 61세의 나이에, 그는 공식적인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778년 66세의 나이로 채공(1720-1799)과 함께 중국에 간 박제자(1750-?)에게 선망의 편지를 썼다.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66세가 된 강세황은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평생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아직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강세황은 6년 뒤인 1784년 10월 72세의 나이로 정사 이휘지(1715~1785)와 서관 이태영(1744~1803)과 함께 감사와 동지의 길을 떠났다. 그는 使),의 부사로서 구경하러 떠난다. 건륭제의 50년 평화통치 사건, 1785년 1월 6일 열린 천수연(天水千)에 조선 사절로 참석하라는 칙령을 내린 사건, 이때 중국으로 표류한 조선인들이 귀국한 사건, 강세황은 건륭제를 자세히 보고 창백한 황제의 안색을 적었다.건강. 순방 중에 그는 청나라 학자 박명(朴明)과 낭중화림( h中華林), 예부상서덕보(bu府商書德報)를 만나 시를 짓고 교류하며 만났다. 청나라 사람들이 모여 강세황의 글과 그림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 옹방강(-方强)이 강세황의 글을 보고 "창골개장(ex gaeex·이 글씨에는 뛰어난 재능이 보인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후 1809~1810년 구불구불한 여행을 떠났던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인연을 맺은 담계 옹방강(1733~1818)이 1784년 강세황의 글을 우연히 만나 감상했다.


강세황 일행이 산해관(山海館)을 통해 북경으로 가는 길목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그림에 적어 시집을 만들었다. 길에서 만난 기괴한 세 가지 풍경이 담긴 <사로삼기첩>과 북경호 얼음 위의 한 줄기를 그린 <용대기첩>이다.帖) is는 세 거장(희지 이씨, 세황 강씨, 태영 이씨)이 함께 겪은 경험을 그림과 시에 담아낸 매우 독특한 시집이다. '기'다. 그것은 그의 눈앞에서 목격된 신비로운 장면을 채택하여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영대빙희]이다. 건륭제의 천수연 참가 초청에 초대된 강세황 일행이 북경의 한 호수 한가운데에서 열린 빙희를 지켜보며 기이한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삼세황(三世 (: 강세황 가문의 기로소 입적 기념 인감)'이라는 원형 인장이 있고, 왼쪽 상단에는 강세황의 호인 '광지'가 새겨진 네모난 인장이 있다. 이 시집을 가로로 펼쳐서 마치 가로로 된 책처럼 연결해서 전체 그림이 드러나고 본래의 인물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북해의 백탑을 배경으로 4면이 중해에 위치한 정자인 수운사 근처에서 펼쳐진 빙희제를 그린 그림이다. 이곳에는 베이징 중앙남해의 얼어붙은 호수가 펼쳐지는 웅장한 풍성하게 담겨 있다.


1784년 12월 21일 건륭제가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고, 강세황 일행이 함께 참석했다. 영대빙희는 조선 사신들이 동지사(東事)로 북경을 방문할 때 꼭 들러야 할 명소였다. 빙휘는 북방의 승마·궁술에 능한 만주족의 풍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팔군의 무예를 고취하는 풍습이었다. 그들이 홍살문을 통과할 때, 무신들은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독특한 무술을 뽐냈다. 삼사는 귀국하여 1785년 2월 14일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은 현재 베이징 자금성 근처의 중간해라고 불리는 호수이다. 북해는 현재 북해공원이 되어 베이징을 찾는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고, 중앙남해는 현재 후진타오 주석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 일반 대중과 관광객의 접근이 제한적이다. 이곳은 고대부터 황제의 공간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모습이 뚜렷합니다. '영대빙희'는 강세황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사람들이 백과사전을 통해 기이한 볼거리로 소개한 필수 명소 중 하나였다.


높이가 23㎝에 불과한 작은 그림이지만 72세 노인이지만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갈망하며 굽이굽이 흐르는 길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에 이어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의 빙희에 관한 시 3편이 수록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에서의 마지막 준비 상황을 확인할 때에도 부채에 오래된 나무죽석(枯石·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그렸다. 시험 삼아 난과 대나무를 중국 종이에 그려 조선 종이에 그린 것과 비교하는 등 붓을 내려놓지 않는 적극적인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렇듯 1784년 구불구불한 구불구불의 결과물인 강세황의 그림은 다른 화단에 비해 다양하고 흥미진진하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꼬불꼬불한 길. 강세황은 부역이라는 막중한 외교적 책임을 떠맡은 길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생생한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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