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사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상의 상징과 양식적 특징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형실에 전시되어 있는 통일신라 미륵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 아미타불상(국보 제82호)은 8세기 전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광선 뒷면에 새겨진 글귀 미륵불에는 381자, 아미타불에는 392자가 새겨져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호 남월산조(南月山 jo)에도 일부 비문이 기록되어 있어 두 불상이 창건 당시부터 중요한 불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갖고 있다


광배 비문에 따르면 성덕왕 18년(719년) 2월 15일(부처 열반일) 신라 관료인 고 김지성 감산사가 일길찬(一吉 ()과 그의 어머니 관초리·불상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김지성은 여러 관직을 거쳐 집사부에 오른 6계급 인물이다. 그는 성덕왕 4년(705)에 견당사로 당(黨)사에 참배하였고, 비문에 병장(尙舍)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뜻을 이루지 못하고 67세의 나이로 조정에서 물러났다. 농촌으로 돌아온 그는 한편으로는 노자와 장자의 조용함에 감탄했는데, 719년 재산을 내놓아 정성을 다해 감산사를 지었고, 이듬해인 720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륵상에 새겨진 글의 끝부분에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관초리의 유골이 동해의 헌지 해안에 뿌려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김지성이 어머니 관초리를 위해 미륵상을, 아버지 일길찬을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왕의 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는 청원으로 김지성의 친남매 개원 이찬, 전처와 재처, 서형(西 () 등 법조계의 지각 있는 존재들이 모두 함께 한다. 모두가 그들이 세상을 벗어나 부처의 영역으로 올라가길 기도했다. 그러한 내용은 흔히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미륵불과 아미타불은 정원 조성 7년차인 719년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보살 비문에는 비문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아미타불 비문에는 김지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대사(大使)인 김치원(金-元)이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행에는 김지성이 성덕왕 19년(720) 4월 22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김지성 생전에 미륵상이 완성되고 비문에는 김지성의 묘사가 반영되었으며, 아미타불상은 김지성 사후 왕의 명을 받아 나마총의 제재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미륵불보다 늦게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비문은 사람 이름 표기법에 차이가 있다. 미륵상에는 김지성의 이름이 '金志'로, 아미타불상에는 '志志'로 쓰여 있다. 또한 동생의 이름인 '양성'은 미륵상에서는 '양성', '아미타불상'에서는 '양성'으로 표기되는데, 이는 당시 발음이 혼재된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비문을 지은 사람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이 두 불상이 우리나라 고대 불교 조각사상 1위인 이유는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 조각상 건립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고금의 흔적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 불상은 눈이 두껍고 얼굴이 넓으며, 큰 불상의 크기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적막감이 강하다. 부처 앞면의 모습을 숭배의 대상으로 강조하려는 석공의 의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육체의 입체감과 포만감을 강조한 8세기 중엽 석굴암의 역동적인 인체의 표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유리벽에 막혀 더 이상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몸에 촘촘히 붙어 있는 손과 팔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두 조각상을 조각한 석공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조각 양식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차분하고 차분하게 변화를 투영했다. 그 결과 섬세하면서도 경건하고 화려하며 깔끔한 감산사 불상의 특징으로 승화되었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부피가 풍부하고 이국적인 장식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문장을 쓰고, 목에는 쌍목걸이를 걸고, 가슴과 팔에는 천복을 걸치고 있다. 팔에 달린 보석이나 치마에 달린 구슬띠의 섬세한 표현도 돋보인다. 이 미륵상들의 장식, 옷 모양, 옷차림, 자세 등은 중국 시안 보징사에 전해지는 당나라의 11면 관인상과 일본 호류지사에 있는 11면 관인보살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엠플은 관능적이고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한 보살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감산사 미륵상은 일반적인 미륵상과 달리 서 있는 자세이고, 관음보살처럼 수장고에 불과 불이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아이콘이다.


또한 아미타불은 어깨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법의를 입고 있어 몸매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반복되는 물결 모양의 대칭적인 U자형 주름은 불상의 부피와 높고 낮은 표면을 강조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사암불상, 굴불사지 남면 불상, 금동불상 여러 점에서도 동일한 불상이 발견된다. 인도의 불교의 성지를 순례했던 옛 승려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인도의 불상들도 데려왔다. 비슷한 형태의 불상은 중국에서도 제거되었다. 감산사 아미타불상은 8세기 중엽 불상만큼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볼륨감과 역동적인 사실감을 강조하는 새로운 흐름을 인식하고 형식을 받아들이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감산사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상은 8세기 전반 불교 조각의 흐름을 보여주고, 상대화 등 신라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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