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이상적인 세계가 담겨 있는 영취사 영산회상도
영취산은 인도 왕사성 인근의 기생산을 번역한 것으로 산꼭대기가 독수리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영취산 석가모니 부처의 설교는 열반 직전 최고의 승려들의 설법 내용 중 하나로 여겨진다. 당시 설교를 기록한 『법화경』은 영취산에서의 설교를 그린 불화를 영산회상도라고 한다.
연꽃처럼 순수한 가르침을 뜻하는 『연화경』에는 타타가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줄 가르침이 담겨 있다. [연화경]은 무수한 비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불협화음으로 표현될 때는 주로 연화경 서품에 등장하는 설교를 그린다. 명상에 잠긴 타타가타는 아무 말 없이 사마디에서 열리고, 그녀의 몸에서 비치는 빛을 통해 관객은 상서로운 광경을 보게 된다. 경전은 미륵보살이 타타가 보여준 상서로운 일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고, 침묵의 타타가 그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타다가타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높은 수미단 위에는 명상에 잠긴 오른손을 쉬며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석가모니 부처가 있다. 화면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붉은 불꽃의 다섯 가지 색으로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일행의 외곽에는 불교가 전파되는 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사천왕과 팔불상이 배치됐다. 불교에서는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가루라, 건달바 등 8불에 사천왕 일가의 지위를 부여해 화면 상단에 배치했다.
부처가 앉은 제단 앞에는 보살 문수와 보살상이 대칭적으로 서 있다. 지혜와 행동, 깨달음과 깨달음의 실천을 상징하는 두 보살은 가르침의 내용이 담긴 수트라와 연꽃을 들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잘 지켰다는 노승 가섭과 창백한 머리의 젊은 비구 아난도 타타가타 좌우에 섰다. 모두가 공손히 손을 모아 설법을 하는 석가모니 부처 앞으로 향할 때도 정면을 바라보는 두 보살상이 눈에 띄었다. 흰 법의를 입은 관음보살은 손에 맑은 물병을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금고에는 작은 타타가 안치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동반자는 세지 보살이다. 그들은 지각 있는 존재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외모를 바꾸고 구조해 준다는 것을 무한한 신뢰의 눈으로 보여준다.
경전에는 부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들보를 통해 8만 명의 보살과 계몽자, 인간과 비인간 단체 등 수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미 깨달음을 얻었고 타타가타의 영역에 서 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망상을 버리고 마음속에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영산회상이 모셔졌던 영취사는 지금은 소멸되어 전승되지 않고 있으며,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각사는 덕유산에, 극락암은 영취산에 있다. 다행히 영취사에서 영산회상을 그린 배경은 조선 후기의 승려 홍유(1718~1774)의 문집인 [추파집]에 수록된 [안음영치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안음영치사기』에 의하면 영치사는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해당하는 안음현에 있었다고 한다. 절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1736년 가을, 주지 보안(普安)에 의해 절의 중흥이 시작되었다. 사찰의 쇠퇴는 땅의 기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당시 극락암이 있던 옛 터의 남쪽으로 절을 옮겨 영치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중건 목적은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고 복을 빌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반영하듯 불협화음 속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꼭대기에는 구름 사이로 용이 나타났고,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왕과 왕비, 세자의 장수와 번영을 기원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방 관청에서 왕실을 대신하여 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전패도 사찰에 봉안되었다.
조선시대 사찰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은 사라졌지만 왕실과 사찰의 유착 전통은 이어져 왕실의 안녕과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임을 강조했다. 영취사에서는 불단 위에 현판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불화 아래쪽에 그림을 그렸다. 영치사는 불화와 예배가 행해지는 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사찰의 사회적 정체성을 새겼을 것이다.
영치사 중건 불멸을 이끈 보안 스님은 이곳에서 60여 년을 살아온 노승으로, 평생의 공로로 절을 되살리겠다는 뜻을 세웠다. 1736년에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연을 시작했고, 1737년에 선당을 짓고, 1738년에 성당을 완성했다. 이듬해인 1739년에 봉향각이 완공되었고, 1740년에 법당이 완공되었다. 대청을 포함한 4개의 홀을 완성하는 데 약 5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대청을 부처의 순수한 땅으로 재현하고 아침저녁으로 헌화할 수 있는 불화를 그리기를 열망하였다. 영취산 석가모니 부처가 절에서 거행될 크고 작은 의식에서 내려온 것처럼 영취산 설교로서 현실의 웅장함을 재현할 수 있는 불협화음이 필요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영산 회상도 2년 후인 1742년 4월에 완공되었다. 그림의 하단에는 그림의 날짜와 시간과 화사, 영치사에 거주하는 승려, 그리고 그림의 제작에 관여한 그림의 소유주 등이 금글씨로 정성스럽게 쓰여 있다. 당시 불화의 웅장함은 불화에 대한 엄숙한 묘사를 반영하였고, '대영산'을 그려 봉안했다는 기록, 불화 제작과 관련된 목록인 연화질 화재를 묘사한 화승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와의 유사점에서도 알 수 있다.
비수회라는 말은 제석천( (石川)의 신하 중 하나인 비수가르마천(毘水毘)에서 유래하였다. 비수갈마천은 건축과 조각과 같은 공장(공장)을 담당하는 천인이다. 우전왕은 석가모니가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머물 때, 세상에 타타가타가 없다고 한탄하며 타타가타의 모습을 닮은 불상을 만들려고 했다. 좋은 장인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그는 장인으로 변신해 불상을 만들었고, 그래서 이후 최초의 불상을 만든 사람, 공장의 신으로 인정받았다. 영산회상을 완성한 화승 스님들의 자부심은 우전 불상을 만든 비슈갈마천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점에서 느낄 수 있다.